이방인과 귀신
The Alien and the Ghost
8th Solo Exhibition
오픈스페이스배, 부산
2025
Bu-San, Republic of Korea, openspace 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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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의 장면 : 공간에 들러붙은 ‘귀신’,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이방인
8th Solo Exhibition
오픈스페이스배, 부산
2025
Bu-San, Republic of Korea, openspace bae
평행의 장면 : 공간에 들러붙은 ‘귀신’,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이방인
서찬석의 애니메이션 영상작업 〈데자뷰〉(2025)는 차 안의 드라이브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두운 도로 위 헤드라이트가 길을 비추고 그 빛에 포착된 동물의 형체가 스친다. 차는 불이 나고 기름이 튀고 장면은 말도 안 되게 뒤섞인다. 화면은 현실의 기록처럼 보이지만 그 전개는 꿈의 구조를 닮았다. 반복되는 장면 속에서 ‘이것이 처음인지, 이미 본 적이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꿈속에서 또 다른 꿈을 꾸기 직전 이미 본 적 있는 무언가를 다시 떠올리는 순간의 기시감. 작가가 말하듯,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모든 이미지는 생생하지만 또렷하지 않다. 〈데자뷰〉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는다. 기억의 재현이 아닌 시선을 되돌리는 장치다. 보는 이의 눈을 화면의 시작점으로 밀어 넣고 그 되돌림 속에서 ‘본다’는 행위 자체를 다시 시험한다.
Dejavu_2025_19s 5m_digital animation
나는 작가가 이야기해준 한 예를 기억한다. 맥주잔과 맥주잔이 놓여 있을 때 그 두 잔이 닿는 순간 혹은 나란히 놓인 상태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생긴다고 했다. 작가는 그 두 잔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지 않는다. 대신 시간을 되감으며 서로 만나지 않는 이야기들의 평행한 장면을 만든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1막이 2막으로 넘어가다가도 다시 1막으로 돌아올 수 있다. 그때 미지의 이미지가 불쑥 끼어들고, 서로 다른 시간이 한 화면에 겹친다. 이 되돌림은 때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이에서 무엇을 기억할 수 있을까. 장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이 반향이 서찬석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전시는 오픈스페이스 배와 맞은편의 안녕, 예술가 그리고 별관 이렇게 세 공간을 모두 사용한다. 각 공간에는 번호가 붙어 있으나 반드시 그 순서로 관람할 필요는 없다. 이 배열은 동선이 아닌 이방인의 시선이 내부로 스며드는 하나의 구조다. 전시는 어느 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서로 다른 장면이 교차하고 각 공간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제목으로 ‘이방인’과 ‘귀신’을 나란히 두었다. 두 인물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자리를 바라본다. ‘이방인’은 발이 묶이지 않았으나 언젠가는 되돌아가야 하는 존재다. 반면 그가 지나온 지역과 각 공간의 익명한 방문자들 그리고 남겨진 자취는 모두 ‘귀신’으로 남는다.

-The act of seeing_2025_ Variable size _Aluminum blinds, LED white lighting


Around_2025_18s 7m _ 226 scenes from the research photos

The Alien’s GPS 01_2025_1091*788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The Alien’s GPS 02_2025_1091*788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서찬석은 ‘리서치’라는 이름으로 GPS를 켜고 걸었다. 그러나 그 행위는 조사라기보다 정처 없이 걷는 자신을 ‘이방인’이자 ‘귀신’으로 바꾸는 일에 가깝다. 작가는 구도심 동광동 인쇄골목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가방을 메고 골목 사이를 통과하며 오랜 시간 부산을 오가며 본 풍경을 따라간다. 지침을 따르지 않고 기억과 직관에 의지해 걷는다. 작가는 도시의 수평이 맞지 않는 곳들을 바라본다. 기울어진 바닥 위에는 기울어진 건물들이 서 있고 그 안에는 여전히 균형을 잡으며 존재한다. 평평하게 다듬어진 길과 높아진 건물들 사이에서도 이 도시는 쉽게 깎이지 않는다. 부산의 오르막길은 사람의 무릎을 갉아먹을 만큼 가파르고 그 경사는 세월의 형태를 남긴다.
작가는 오픈스페이스 배의 윈도우 벽면에 검은색 먹으로 〈hope〉(2025)를 그렸다. 이 드로잉은 건물 안으로 이어지는 원형 계단이다. 작품의 제목인 ‘hope’는 위로 나아감의 상징이 아니다. 나아가려는 형태이면서 동시에 멈춰 있는 상태다. 안으로 말려 들어가는 계단은 무언가를 향해 올라가려 하지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시작과 끝이 맞닿은 그 중간지대에서 희망은 멈추지 않고 반복된다. 이곳에서의 시선은 내부를 투시하지 못한다. 벽면과 유리의 굴절로 생긴 왜곡된 시야는 오히려 더 큰 기대를 품게 만든다.
HOPE_2025_Variable size_Ink on the wall
그리고 그 안에는 부산 중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Commodore〉(2025)가 있다. 이 건물의 형태는 실제 구조와는 조금 어긋나 있다. 코모도호텔은 일본식 양식을 닮았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혼종적인 건축물이다. 외관만으로는 그 정체를 단정할 수 없기에 오히려 이방인의 시선을 더 오래 붙잡는다. 이방인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반대편에는 또 다른 건물 〈The Culture〉(2025)가 있다. 낮은 층수와 지워진 간판과 익숙한 입구의 형태는 부산의 오래된 건물들을 닮았다. 특별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지만 스쳐 지나가기 좋은 자연스러운 도시의 얼굴이다. 두 건물은 서로를 마주 보며 이 도시의 안과 밖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나는 이방인의 욕망을, 다른 하나는 그들이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일상의 표면을 담고 있다.

Commodore_2025_
Variable size_Ink on the wall

The Culture_2025
_Variable size_Ink on the wall
이러한 표면은 〈Empty Room〉(2025)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붉은색 테두리의 칸이 한 생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마치 그 존재의 흔적을 확인하듯 형체를 붙잡는다. 반복 재생되는 이 영상은 시간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 안에서 생명은 움직이지만 살아 있지는 않다. 그것이 생명일까 아니면 귀신일까. 움직임은 생명을 흉내 내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모방은 이미 죽음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Empty Room〉의 ‘텅 빈 방’은 전시의 조건을 드러낸다. 허구가 진실보다 오래 남고 부재가 존재를 대신하는 자리다.
-Empty Room 01,02_2025_Looping video_digital animation
서찬석은 이번 전시에서 드로잉 속 인물과 동물의 흔적을 지워낸다. 작가는 더 이상 이야기를 담거나 사연을 수집하지 않는다. 대신 말과 사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형태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한다. 그의 화면 속 오래된 건물들은 과거의 화려함과 현재의 굳건함을 함께 품은 채 그저 ‘서 있는’ 존재로 남는다. 곧지 않은 계단과 기울어진 건물의 모습은 실제 지명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장소처럼 느껴진다.

-Dividing Stairs 01_2025_1091*788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Dividing Stairs 02_2025_1091*788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그리고 이곳에는 여전히 서로를 지켜보는 눈이 있다. 이들의 소리와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존재들, 그것은 이곳을 떠나지 못한 ‘귀신’이자 다시 돌아온 ‘이방인’이다. 귀신의 시선은 안쪽에 머물고 이방인의 시선은 바깥을 맴돈다. 두 시선은 서로를 향해 교차하며 그 사이에서 공간과 드로잉, 영상은 서사를 쌓지 않고 구조를 드러낸다. 서찬석의 〈이방인과 귀신〉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를 그린다.


-Ghost Mark 01_2025_788*1091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Ghost Mark 03_2025_788*1091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Ghost Mark 02_2025_788*1091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Ghost Mark 04_2025_788*1091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Ghost Mark 04_2025_788*1091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The seen_2025_가변크기_Aluminum blinds, ping pong ball, lacquer spray
건물들은 여전히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채 지금은 허기진 상태로 존재한다. 한때 중심이었던 장소는 이제 비어 있는 공간이 되어, 다른 시선이 머무는 자리가 된다. ‘귀신의 자리’라 부를 수 있는 이 빈 서사는 공포영화의 예고된 장면처럼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면이 생겨날 가능성을 위해 비워둔 공간에 가깝다. 드로잉으로 만들어진 허구는 그 빈자리에서 때로 해프닝이 되어 소문으로 남는다. 그렇게 이 공간은 다시 채워지고,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지며 또 하나의 ‘평행의 장면’을 완성한다.
큐레이터 유경혜


-영도구 봉래동 5가_2025_1000*700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대청동 2가_2025_1000*700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대청동 1가_2025_1000*700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대청동 2가_2025_1000*700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광복동 1가_2025_1000*700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보수동 1가_2025_1000*700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영도구 신선동 2가_2025_1000*700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영도구 신선동 1가_2025_1000*700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남포동 2가_2025_각 1400*1000 2점 1세트
_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중앙동 4가_2025_1000*700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중구 중앙동 4가_2025_각 1000*700 2점 1세트_ Acrylic paint, ink, water-based paint on paper
이방인과 귀신 2025
The Alien and the ghost
<이방인이 귀신이고, 장소는 거의 침묵인 장면에 대한_양효실>
서찬석 작가의 부산 중구 대안공간 오픈스페이스 배에서의 2025년 전시 《이방인과 귀신(The Alien and the ghost)》은 공간 운영자-기획자 김정훈의 제안으로 10여 개월을 서울 홍은동 집과 부산 중구를 오가며 원도심에 대한 리서치로부터 시작해서 정동을 매개로 한 상호작용,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의 중첩으로의 나의 사라짐까지의 “서사”를 시각화한 회화, 드로잉, 영상, 설치 기반 작업이다. 배를 “회화가 온전히 보이기 어려운, 회화 감상을 위한 물리적 공간 확보가 어려운 지저분한 공간”으로 규정한 김정훈은 작가에게 “배에서의 회화 전시의 모범”이 될 전시를 요청했고, 프로젝트 기간에 오픈스페이스 배 2.0이 문을 닫는 결정이 내려졌기에 서찬석의 전시는 본의 아니게 특정 태도를 담지한 전시 공간의 마지막 전시로서의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화이트 큐브를 전제로 한 회화와 어정쩡하게 연결된 채 구석, 바깥, 더러운 곳에서 자주 전시를 해온 작가에게는 “어디서든 전시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이란 게 있었기에 중구라는 지역을 반영한, 회화에 불친절한 배에서도 가능한 회화의 구현이라는 제안/요구는 이미 구로, 평택, 부산과 같은 장소에서 장소-특정적 작업을 해온, 회화라기보다는 만화나 벽드로잉, 만화가 걸맞은 이름일 것 같은 작업을 해온 작가에게는 새로운/어려운 임무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작가는 공공미술의 일환으로 이미 상징적/역사적 이야기가 작동하는 장소들에 방문해서 그곳을 회화적으로 해석-번역하는 작업들을 하면서도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강렬한 정동이 지배하는 장면으로 풀어내는 작업 역시도 놓치지 않고 진행해왔다. 즉 공적인 맥락에서 장소를 정치적으로 재배치하는, 작업과 사적인 맥락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을 복잡한 레이어가 작동하는 방식으로 강렬한 색과 텍스트의 병치를 통해 “토해내는” 작업을 나란히 진행해왔던 것이다. 이번 배의 전시 이전에도 작가는 이미 부산 영도에서 리서치 기반 이미지 작업을 진행했기에 부산은 그에게 이미 낯설지 않은 장소, 풍경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가 끝난 후 만난 자리에서 작가는 내게 “주장하지 않는 작업”을 하려했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아마 이 문장은 공적 역사/이야기에 침윤된 장소/이름들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역사/이야기를 제거하는 쪽으로 이번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전달한 문장으로 나는 결국 이해했다. 자신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것의 목격자로서의 장소는 이후 특정 역사/사건으로 환원되고 의미화되기 마련이다. 즉 장소라는 감각-육체는 이름으로서의 명사에 의해 납작해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일종의 장소의 무의식처럼 99퍼센트 이상의 이야기는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거의 모든 것을 겪어낸(suffered and suffering) 장소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사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비인격적/물질적 타자이다. 작가가 말한 “주장”은 그런 장소, 어떤 이야기도 갖다 쓸 수 있고 어떤 이야기와도 무관하지만 유독 하나의 이야기에 볼모인 장소를 그런 이야기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때, 그러한 장소의 행위성을 복원하기 위한 조력자로서의 예술가가 들여다봐야 하는 자신의 욕망, 장소에 방문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내용일 것이다. 장소라는 전체(wholeness)를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일종의 총체성(totality)과 분리하기, 이것이 작가가 말한 “주장하지 않는 작업”의 임무라고 해석했다.
이번 전시가 끝난 후 만난 자리에서 작가는 내게 “주장하지 않는 작업”을 하려했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아마 이 문장은 공적 역사/이야기에 침윤된 장소/이름들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역사/이야기를 제거하는 쪽으로 이번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전달한 문장으로 나는 결국 이해했다. 자신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것의 목격자로서의 장소는 이후 특정 역사/사건으로 환원되고 의미화되기 마련이다. 즉 장소라는 감각-육체는 이름으로서의 명사에 의해 납작해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일종의 장소의 무의식처럼 99퍼센트 이상의 이야기는 수면 아래로 내려간다. 거의 모든 것을 겪어낸(suffered and suffering) 장소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사건으로 환원될 수 없는 비인격적/물질적 타자이다. 작가가 말한 “주장”은 그런 장소, 어떤 이야기도 갖다 쓸 수 있고 어떤 이야기와도 무관하지만 유독 하나의 이야기에 볼모인 장소를 그런 이야기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때, 그러한 장소의 행위성을 복원하기 위한 조력자로서의 예술가가 들여다봐야 하는 자신의 욕망, 장소에 방문하기 전부터 “갖고” 있던 내용일 것이다. 장소라는 전체(wholeness)를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일종의 총체성(totality)과 분리하기, 이것이 작가가 말한 “주장하지 않는 작업”의 임무라고 해석했다.
이번 전시를 끝낸 뒤 배운 새로운 사실로 작가는 자신이 옮겨-놓은(trans-late) 원도심 중구의 풍경에는 인간이 부재한다는, 자신의 (무의식적)작업에 대한 자신의 의식적/사후적 발견을 이야기했다. 즉 자신의 공적 장소 이미지화(imaging)가 의식적/재현적 행동은 아니었다는 발견을. 등장 인물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비가시적)세팅으로서의 장소에서 인간이 부재하면/인간을 빼면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가령 전시 중간에 들어온 전시 제목 “이방인과 귀신”의 두번째 이름인 귀신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누구의 귀가 그 이야기를 수신할까, 혹은 수신 중일까? 누구의 눈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이방인으로서 중구를 방문하고 자신과 닮은, 자신을 투사한 인간을 지우는 “빼기”의 작업이 불러들일 비인간인 귀신이 이번 작업에서 먼저는 작가이고, 그다음 위치가 우리 혹은 당신들이다. 작가는 stranger로서의 이방인이 “감정을 갖고 현재 내 옆에 존재하는” 유형의 외지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면 자신이 선택한 alien으로서의 이방인은 “현재에 부재하는 존재”라고, 그래서 “이방인과 귀신”은 “다른 시간을 살아가지만 부재로서만 존재한다는 면에서 같은 성질을 공유하는, 윤회-가능한 어떤 구조”라고 설명했다. “주장”이 “현재에 단단히 귀속된, 존재하는 이들”의 행위라면 주장하지 않는 작업을 하겠다는 선언은 그가 이번 작업을 위한 “작가 노트”에 기술한 것처럼 “사유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공간의 표면”, 하나의/중요한 이야기에 저항하는, 끝내 자신의 이질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장소/세팅의 ‘비타협적인 대치’에서 멈추겠다는 결단으로 읽힌다. “예술가로서 지역 위에 서서” 주장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 인간에 잠식당한 장소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비로소 시작되는 사건들, 장면들을 위해 자신의 말-욕망-의도를 최소화하겠다는 반성에 이르게 된 동기를 묻자 작가는 “아무리 들여다보려고 해도 응답하지 않는 표면에 반복해서 부딪히다 보니 이르게 된 좌절의 지점”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역의 대표적 이야기, 혹은 작가의 말대로라면 “데이터를 제거하고 지역을 보려 했을 때”, “남은 것은 형태를 잃고, 느껴지는 것은 엉킨 시간의 축적들”이었다고, “선은 체온처럼 떨리고 면은 머무름의 길이가 되었다”고 했다. 선과 면을 잘 사용할 줄 아는 이 작가가 이제 자신의 선과 면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로 나는 잘(못)들었다.
장소를 뚫고 들어가거나/내 감정과 지식을 투사하거나 건물 ‘안’(망상!)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사람들이나 이야기를 확보하려는 멀리서 온 인류학자의 태도가 아니라 적대하는 이질성으로서의 표면에 머무르겠다는 작가의 선언과 그가 학부 시절부터 사용해 온 회화적 표면의 물질성이 묘하게 조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까? “중구 중앙동1가”나 “중구 보수동1가”와 같이 행정적 주소가 제목인,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인간적-감정적 교류나 만남을 자제하려는 가장 회화로 보이는 채색화 작업은 모두 “종이에 먹, 아크릴 물감, 수성 페인트”라는 소재-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견 포스터처럼 보이는 이 회화들은 모두 판화용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형식적 특성을 놓고 “플랫하게 물감을 빨아들이는” 특성의 판화지에 흰색 수성 페인트를 베이스로 올리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과 먹을 사용해서 보이는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포스트모던 시뮬라크르 스케이프로서의 주변 초고층 아파트 사이 원도심의 근대적 풍경은 레트로 감성의 소재이거나 아파트로의 이주에서 실패한 인간 잔여물들의 장소이다. 그것을 재현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과 마음과 이야기가 깃들 배경으로서 좋은 세팅이다. 그런 장소는 작가의 매트한 종이 표면, 말하자면 색을 흡수하면서 발산하는 천의 존재론적/탈시간적 위상을 얻지 못한 가벼운 표면에 얹힘으로써 무-가치해진다. 캔버스 천 위 색이라는 고전적인/교조적인 회화에서 이탈한, 일견 포스터처럼, 복제물처럼 반복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움과 무-의미를 위한 “저급한” 매체에 얹힌/찍힌 회화적 표면으로서의 장소 이미지는 심지어 장소적 특이성을 뺀 행정적 지번을 제목으로 선정한 작가의 “숙고”에 의해 레트로 감성,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박한 삶, 이야기를 뺀 채 죽은 과거의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로 전유되는 도시재생사업의 장소들의 동일성/반복성에서 이탈한다. 알루미늄 프레임에 탈부착가능한, 이 회화라고 불리지만 꼭 회화는 아닌 이 종이 그림이 여기저기를 동시에 건드린다. 이미 허물어지고 있고,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체화한 “사선들”이 범람하는, 회색 시멘트로 탈색된 부분들과 강렬한 채도의 원색 페인트가 공존하는 중구의 건물들―주택, 가게, 빌딩―은 얹어져 있는 이야기에 저항하면서 즉물적인 있음(literal thereness)으로 존립한다.
내가 특히 좋아한 그림은 시멘트 골조만 남은 좁은 공간에 걸려 있던 두 점의 계단 드로잉이었다. 도시재생사업에 의해 엄선된 중구의 문화상품은 주지하듯이 “40계단”이다. “일제강점기 해안가를 매립하고 복병산 일부를 깎아 주택지를 만들면서 형성된 동광동 40계단”은 6·25 전쟁 기간 위에서부터 내려온 한반도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구호물자를 교환하는 장터이자 어딘가에서 헤어진 가족을 만나려고 마냥 기다리던 장소라는 대표적 이야기에 몰수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묻히고 제거되고 수몰되는 과정과 동시적이다. 심지어 원래 있던 곳에서 화재로 40미터 이동해서 재건된 계단, 이라는 사실은 이곳도 이미 시뮬라크르적 이미지에 기반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40계단 문화관광 테마 거리”로 조성된 이곳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의 호기심, 핸드폰을 피해, 혹은 우리가 모르는 그 많은 이야기로 인해 낮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일종의 귀신이다. 원도심은 도시 입안 기획자들과 인스타용 사진을 찍으러 방문하는 외지인들의 이해관계에 몰수된, 원주민들은 거의 안 보이는 기괴한 장소인 것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대표적 도상인 40계단 말고, 작고 좁은 드글드글한 계단들을 올 때마다 찍었다고 했다. 노인들, 빈민들, 이주민들, 독거인들, 불법체류자들, 기타 등등의 비인간들의 이야기로 그렇다고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대신에 올 때마다 감지되는 차이들, 가령 없던 화분들이 계단 위에 놓이거나 대문에 새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들을 읽었다고 했다. 실패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살아서 귀신인 이들의 아름다움들, “욕망들”의 기표들, 물질들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찍은 계단들의 절반도 되지 않을 32개의 계단을 작가는 두 점의 흑백 드로잉 형식으로 기록했다. 16면으로 쪼개진 화면에 모두 다른 계단들, 이름/기능이면서 차이/삶인 형상들이다. <디바이딩 계단>을 관람한 작가의 친구는 “오래된 도시의 잔상의 연속성”이라고 해석했다고 들었다. 귀신과 잔상은 인접해 있기에 친구의 감각적 읽기는 내게 놀라운 감동을 일으켰다. 시시하고 무의미한, 그렇기에 재현의 가치화에서 자유로운 이 틈새 공간, 수십 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들은 중구의 독특한 실재이다. 동시에 그런 실재, 재현에 저항하는 실재를 잔상으로, 반복으로 붙들려는 작가의 시도가 친구에게 영화적/애니메이션적 움직임/운동을 일으켰다면, 모든 재현과 감정은 결국은 잔상과 잔여를 위한 알리바이라면, 살아서 귀신인 이들과 그들의 평지인 계단을 우리는 어떻게 묵시록적 미래, 회색조의 미래와 연결할 수 있을까? 좁고 더러운 계단으로 올라가야 집이고 내려가야 세상인 이 장소와의 만남을, 표면이면서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곡선인 이 틈새 장소와의 만남은 이번 전시의 수확이라고 말해야 할까. 작가와 관람자였던 나와 당신의?
전시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The Seen>이란 제목의 흰 색 블라인드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검은 공이다. 작정하고 “Ghost Mark(귀신의 흔적)”이란 제목이 붙은 네 점의 “회화”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 그러므로 초현실적/비현실적 중첩을 시각화한 장면으로서 그 옆에 있다. 현실의 논리가 무너진, 중력이 오작동하는 근대적 풍경들, 상황들이 보인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인 것일까? 디지털 애니메이션 <데자뷰>가 무한 상영되고 있기에 이곳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비현실적인 상태를 욕망하거나 반복하는 좁은 방이다. 자동차를 몰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부산 중구에 반복적으로 도착했던, 그러므로 역시 같은 방식으로 홍은동 집으로 돌아갔던 자신의 10개월의 상황에 대한 짧은 보고문 같고, “보고 있다는 착각”이라는 자의식-의심이 서사적 지평을 전제한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 무한히 대체될 뿐인 이미지들의 분열증적 나타남의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다. “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내부를 굴절시키는 타자의 응시, 빛과 색을 빨아들이는 이 작고 가벼운 “검은” 공, 블라인드 사이에 겨우 앉아 있지만 이미 누군가의 머릿 속에서는 어딘가로 튀어 오르고 있을 탁구공, 비어있음과 가벼움과 에너지를 동시에 함축한 공, 그래서 긍정문과 부정문이 동시에 쓰일 수 있음을 현시하는 공. 첫번째 방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act of seeing”에서 시작된 이 전시는 <The Seen>으로 막을 내린다. 내가 보는 행동은 내가 보여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지각적 사실을 환대하며 이렇게 끝난다. 이방인으로 와서 귀신으로 돌아가는 이 한번 돌린 바퀴의 한바탕은.
장소를 뚫고 들어가거나/내 감정과 지식을 투사하거나 건물 ‘안’(망상!)으로 들어가서 그곳의 사람들이나 이야기를 확보하려는 멀리서 온 인류학자의 태도가 아니라 적대하는 이질성으로서의 표면에 머무르겠다는 작가의 선언과 그가 학부 시절부터 사용해 온 회화적 표면의 물질성이 묘하게 조응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까? “중구 중앙동1가”나 “중구 보수동1가”와 같이 행정적 주소가 제목인,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인간적-감정적 교류나 만남을 자제하려는 가장 회화로 보이는 채색화 작업은 모두 “종이에 먹, 아크릴 물감, 수성 페인트”라는 소재-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일견 포스터처럼 보이는 이 회화들은 모두 판화용 종이에 그려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형식적 특성을 놓고 “플랫하게 물감을 빨아들이는” 특성의 판화지에 흰색 수성 페인트를 베이스로 올리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과 먹을 사용해서 보이는 이미지를 재현하거나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포스트모던 시뮬라크르 스케이프로서의 주변 초고층 아파트 사이 원도심의 근대적 풍경은 레트로 감성의 소재이거나 아파트로의 이주에서 실패한 인간 잔여물들의 장소이다. 그것을 재현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과 마음과 이야기가 깃들 배경으로서 좋은 세팅이다. 그런 장소는 작가의 매트한 종이 표면, 말하자면 색을 흡수하면서 발산하는 천의 존재론적/탈시간적 위상을 얻지 못한 가벼운 표면에 얹힘으로써 무-가치해진다. 캔버스 천 위 색이라는 고전적인/교조적인 회화에서 이탈한, 일견 포스터처럼, 복제물처럼 반복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움과 무-의미를 위한 “저급한” 매체에 얹힌/찍힌 회화적 표면으로서의 장소 이미지는 심지어 장소적 특이성을 뺀 행정적 지번을 제목으로 선정한 작가의 “숙고”에 의해 레트로 감성,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부박한 삶, 이야기를 뺀 채 죽은 과거의 노스탤지어적 이미지로 전유되는 도시재생사업의 장소들의 동일성/반복성에서 이탈한다. 알루미늄 프레임에 탈부착가능한, 이 회화라고 불리지만 꼭 회화는 아닌 이 종이 그림이 여기저기를 동시에 건드린다. 이미 허물어지고 있고, 작가의 주관적 해석을 체화한 “사선들”이 범람하는, 회색 시멘트로 탈색된 부분들과 강렬한 채도의 원색 페인트가 공존하는 중구의 건물들―주택, 가게, 빌딩―은 얹어져 있는 이야기에 저항하면서 즉물적인 있음(literal thereness)으로 존립한다.
내가 특히 좋아한 그림은 시멘트 골조만 남은 좁은 공간에 걸려 있던 두 점의 계단 드로잉이었다. 도시재생사업에 의해 엄선된 중구의 문화상품은 주지하듯이 “40계단”이다. “일제강점기 해안가를 매립하고 복병산 일부를 깎아 주택지를 만들면서 형성된 동광동 40계단”은 6·25 전쟁 기간 위에서부터 내려온 한반도 전국 각지의 피난민들이 구호물자를 교환하는 장터이자 어딘가에서 헤어진 가족을 만나려고 마냥 기다리던 장소라는 대표적 이야기에 몰수되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묻히고 제거되고 수몰되는 과정과 동시적이다. 심지어 원래 있던 곳에서 화재로 40미터 이동해서 재건된 계단, 이라는 사실은 이곳도 이미 시뮬라크르적 이미지에 기반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40계단 문화관광 테마 거리”로 조성된 이곳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의 호기심, 핸드폰을 피해, 혹은 우리가 모르는 그 많은 이야기로 인해 낮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일종의 귀신이다. 원도심은 도시 입안 기획자들과 인스타용 사진을 찍으러 방문하는 외지인들의 이해관계에 몰수된, 원주민들은 거의 안 보이는 기괴한 장소인 것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대표적 도상인 40계단 말고, 작고 좁은 드글드글한 계단들을 올 때마다 찍었다고 했다. 노인들, 빈민들, 이주민들, 독거인들, 불법체류자들, 기타 등등의 비인간들의 이야기로 그렇다고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했다. 대신에 올 때마다 감지되는 차이들, 가령 없던 화분들이 계단 위에 놓이거나 대문에 새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들을 읽었다고 했다. 실패한 사람들, 잊혀진 사람들, 살아서 귀신인 이들의 아름다움들, “욕망들”의 기표들, 물질들이었다고 했다. 자신이 찍은 계단들의 절반도 되지 않을 32개의 계단을 작가는 두 점의 흑백 드로잉 형식으로 기록했다. 16면으로 쪼개진 화면에 모두 다른 계단들, 이름/기능이면서 차이/삶인 형상들이다. <디바이딩 계단>을 관람한 작가의 친구는 “오래된 도시의 잔상의 연속성”이라고 해석했다고 들었다. 귀신과 잔상은 인접해 있기에 친구의 감각적 읽기는 내게 놀라운 감동을 일으켰다. 시시하고 무의미한, 그렇기에 재현의 가치화에서 자유로운 이 틈새 공간, 수십 개의 좁고 가파른 계단들은 중구의 독특한 실재이다. 동시에 그런 실재, 재현에 저항하는 실재를 잔상으로, 반복으로 붙들려는 작가의 시도가 친구에게 영화적/애니메이션적 움직임/운동을 일으켰다면, 모든 재현과 감정은 결국은 잔상과 잔여를 위한 알리바이라면, 살아서 귀신인 이들과 그들의 평지인 계단을 우리는 어떻게 묵시록적 미래, 회색조의 미래와 연결할 수 있을까? 좁고 더러운 계단으로 올라가야 집이고 내려가야 세상인 이 장소와의 만남을, 표면이면서 구부러지고 휘어지는 곡선인 이 틈새 장소와의 만남은 이번 전시의 수확이라고 말해야 할까. 작가와 관람자였던 나와 당신의?
전시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The Seen>이란 제목의 흰 색 블라인드 사이에 끼워져 있는 검은 공이다. 작정하고 “Ghost Mark(귀신의 흔적)”이란 제목이 붙은 네 점의 “회화”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구조, 그러므로 초현실적/비현실적 중첩을 시각화한 장면으로서 그 옆에 있다. 현실의 논리가 무너진, 중력이 오작동하는 근대적 풍경들, 상황들이 보인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작가의 해석인 것일까? 디지털 애니메이션 <데자뷰>가 무한 상영되고 있기에 이곳은 그 자체로 초현실적/비현실적인 상태를 욕망하거나 반복하는 좁은 방이다. 자동차를 몰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부산 중구에 반복적으로 도착했던, 그러므로 역시 같은 방식으로 홍은동 집으로 돌아갔던 자신의 10개월의 상황에 대한 짧은 보고문 같고, “보고 있다는 착각”이라는 자의식-의심이 서사적 지평을 전제한 시각에 들어오지 않는 무한히 대체될 뿐인 이미지들의 분열증적 나타남의 형태로 구조화되어 있다. “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내부를 굴절시키는 타자의 응시, 빛과 색을 빨아들이는 이 작고 가벼운 “검은” 공, 블라인드 사이에 겨우 앉아 있지만 이미 누군가의 머릿 속에서는 어딘가로 튀어 오르고 있을 탁구공, 비어있음과 가벼움과 에너지를 동시에 함축한 공, 그래서 긍정문과 부정문이 동시에 쓰일 수 있음을 현시하는 공. 첫번째 방의 작품 제목이기도 한 “act of seeing”에서 시작된 이 전시는 <The Seen>으로 막을 내린다. 내가 보는 행동은 내가 보여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지각적 사실을 환대하며 이렇게 끝난다. 이방인으로 와서 귀신으로 돌아가는 이 한번 돌린 바퀴의 한바탕은.
양효실(비평)